음악

[스크랩] 아름다움에 관하여

걷는 즐거움 2007. 10. 15. 14:56
 

 

  

 

 

 



다발의 꽃이 파스텔로 번진다

나른한 창가에서 그녀는 책을 읽는다
행간을 따라 푸른 추억들이 떼지어 지나간다
지느러미와 그리움을 잘라낸다
커튼의 줄무늬가 흔들리고
가슴속에 묻어둔
문장들이 눈을 뜬다
그녀는 유리컵 속 추억을 마신다
책장을 넘기며 여름이 지나갔다고 생각한다
그녀 속에서 타오르는 불빛이
탁자 위에 놓인 나이프에 비친다
나이프에 잘려나간 어둠 쪽에 얼핏
지나간 젊음과 숨막히던 고통의 한 끝이 보인다
시장기를 느끼며 그녀는
햇살과
마요네즈를 섞어
한 접시의 문장을 요리한다
그녀 속에서 타오르는 불빛이
파스텔로 번지는 일상의 그늘을 비치고 있다

 

 

 

책 읽는 여자 / 이진흥



 

 

 

 

 

내가 좋아하는 C화백의 그림에는 언제나 고요함과 평화가 들어있다.

그는 산을 즐겨 그리는데, 나는 그의 산을 통해서 나무와 바위, 골짜기와 능선을 다시 보게 되었다.

산은 짐승의 발자국이나 풀벌레의 미세한 동작 그리고 물소리와 바람소리를 품어안고 있다.

뿐만 아니라 햇살의 농도와 색채의 변화 등 자연과 우주의 비밀이 그의 산을 통해서 조용히 드러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나름대로 사물을 바라보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언젠가 그의 화실에 갔다가 눈에 익은 산이 아니라 한 젊고 아름다운 부인을 그린 파스텔화를 만났다.

암녹색 마분지에 청색과 연한 주황을 주조로 하고 흰색과 분홍색을 곁들여 그린 여인의 화사한 자태가 첫눈에 나를 매혹시켰다.

그녀는 나른한 오후,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비쳐드는 햇살을 받고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 앞에는 몇 개의 과일과 꽃병이 놓여 있고 꽃병에는 하얗게 핀 안개꽃 사이에 붉은 카네이션 몇 송이가 섞여서 어두운 공중에서 빛나고 있었다.

고요한 평화가 화폭 전체를 감싸고 있는데 암녹색의 어두운 그늘에서 환하게 떠오른 여자의 무릎 위에는 한 권의 책이 펼쳐져 있고,

약간 갸웃한 자세였지만 단정한 어깨와 조용한 눈매가 매혹적이었다.
책 읽는 여자를 그린 것은 드물지 않다. 그것은 화가들이 즐겨 그리는 화장하는 여자, 잠자는 여자, 목욕하는 여자 등 흔한 포즈 중의 하나이지만,

그 날 내가 만난 그 여자는 아주 특별한 감동을 주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나는 그녀의 일기장을 훔쳐본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그 그림을 대단히 좋아하는 것을 보고 C화백은 그것을 나에게 주었다.

원래 그 그림에는 제목이 없었지만 나는 ‘책 읽는 여자’라는 제목을 붙였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정중동의 상태이다.

몸은 움직이지 않지만 읽고 있는 책의 내용으로 해서 지금 그녀의 마음은 대단히 역동적인 상태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녀가 지금 읽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림의 분위기로 보아 프로이트나 라깡 같지는 않고, 아마도 지이드나 브론테

혹은 헤세나 토마스 만일는지도 모른다. 지금 그녀는 크늘프의 마지막 목소리를 듣거나 한스 카스토르프와 함께

스키를 타고 눈보라 속을 달리고 있을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책 읽는 여자’를 나의 연구실에 걸어 놓고 여러 가지 상상을 한다.

그녀가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 예컨대 사랑과 이별, 그런 것에 대한 추억 따위를 상상해 본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오랫동안 책을 읽었으므로 문득 허기도 느낄 것이고 목도 마를는지 모른다.

탁자 위에 있는 유리컵 속의 냉수를 마시면서 자신의 내부에 타오르는 젊은 날의 어떤 불꽃을 응시할는지도 모른다.

책 속의 세계와 현실의 거리를 떠올렸을 때, 그녀는 문득 책을 읽느라고 점심을 걸렀다는 사실을 생각해 낼는지 모른다.

안온한 일상 속에서도 이유 없이 밀려드는 허기, 꽃과 과일 혹은 그리움과 추억이 아름답게 뒤섞인 파스텔의 화폭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녀를 묘사해 보았는데 그것이 내 시 속의 ‘책 읽는 여자’이다.

 

 

책 읽는 여자에 대한 상상 / 이진흥

 

 

 

 

 

 

  

 

시인이나 소설가 혹은 화가들은 이처럼 여인이라는 대상을 앞에 놓고 사실적이거나 혹은 상징적인 시선으로

자신들만의 탐미적 감성을 이끌어 내곤 한다. 어느 한곳을 향해 진지한 모습으로 몰두하는 여인의 모습은 무척 아름답다.

위의 소개한 글처럼 만추의 햇살이 드는 창가에 앉아 평화로운 모습으로 책을 펼쳐 읽는 모습도 아름답고

버스 정류장에 앉아 귀에 헤드폰을 낀채 발을 까딱거리며 음악에 빠져든 여인의 모습도 생각보다 아름답다.

바쁜 일상 속에 틈틈이 뜨개질에 열중하는 여인의 모습은 마치 한폭의 수채화를 연상케 하는 격조 높은 아름다움이 있다. 

오랜만의 외출을 위해 가을 단풍같은 화사한 색조의 옷을 입어 보곤 커다란 거울 앞에 서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매무새를 가다듬는 여인의 모습에서는 세월에 묻혀 조금씩 잊혀져 가는 설렘의 의미가 떠올려진다. 

그리고 화장대 앞에 앉아 익숙한 손놀림으로 눈썹을 그리고 파우더를 두드리고 입을 오무려 립스틱을 바르며

마치 수공예를 하듯이 자신의 얼굴을 향해 진지하게 몰두하는 여인의 모습은 사뭇 예술적이다.  

평범하며 핏기없던 맨얼굴이 차츰 또렷한 윤곽을 지닌 매혹적인 모습으로 변해가는 그 화장의 과정이란 사실 얼마나 창조적인가.

정면을 응시하며 운전에 열중하는 여인의 옆 모습을 신호대기 중에 만나게 될때. 그녀의 보드라운 귀밑머리가 바람에 휘날리고

따가운 가을 햇살이 찰랑거리는 귀고리에 부딪혀 은색으로 반짝거리는 것을 볼때도 문득 아름답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하지만 에이프런을 두르고 가족을 위해 주방에서 정성껏 음식을 만드는 여인의 뒷모습 보다 더 아름다운것이 있을까.

조금씩 땅거미가 몰려오는 늦은 오후. 서편으로 난 부엌의 작은 창문으로 황금빛 석양이 들어와 여인의 목덜미를 붉게 물들이고

탁탁거리는 도마소리가 운동장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섞이는 장면은 진정 아름다운 호수와도 같다. 평화가 느껴진다. 

젖은 손을 행주로 닦으며 베란다에 널려진 빨래를 찬찬히 살피고는 멀리 찻길을 응시하는 여인의 눈길은 그러나 텅 비어있다.

긴 세월을 두고 남몰래 지녀온 비단결같이 고운 기다림이 여인의 눈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것이다. 여인은 드러나지 않을 기다림을

지니기에 더욱 아름답다. 꿈을 꾸듯 간직해온 숙명적인 기다림은 홀로 있을때만 눈물이라는 찬란한 슬픔의 결정체를 흘리게 만든다.

그 비밀스럽고 치열한 여인의 내면이 내게는 진정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曲 : Wild flower / Skylark
 

출처 :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글쓴이 : 秘의旅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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