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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랑이 아닌 것 4가지

걷는 즐거움 2007. 2. 11. 05:57
한국어에서 ‘삶’, ‘사람’, ‘사랑’은 같은 어원에서 출발했습니다. ‘사람’의 ‘삶’에 ‘사랑’이 필수적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은 어떤 허물도 덮어줍니다. 미움은 위험한 편견이고 사랑은 위대한 편견입니다. 사랑하면 키와 인물과 학력이 보이지 않고, 과거의 실패와 상처와 전력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과거를 자꾸 말함은 사랑이 없는 표시입니다.

사랑은 ‘환경 이김이’이고 ‘인생 지킴이’입니다. 사랑은 나쁜 것은 사라지게 하고 좋은 것은 생기게 합니다. 사랑은 지옥도 천국으로 만듭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걸으면 청계천이 센 강보다 아름답게 보이고, 사랑하는 사람의 하숙방은 어떤 황궁보다 멋지게 느껴지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속삭임은 어느 음악보다 감동적이고, 사랑하는 사람과는 다툼마저 행복의 씨앗입니다.

그처럼 위대한 사랑이 왜 가끔 눈물의 씨앗이 될까요? 그 이유는 사랑의 오해 때문입니다. ‘자녀사랑’의 예를 들면 사랑에는 4가지 대표적인 오해가 있습니다.

지나치게 부드러운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가 “오냐? 오냐?” 하며 자녀의 원대로 다 해주는 것은 자녀에게 독약을 먹이는 것입니다. 자녀가 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보고도 기가 죽는다고 제지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질서를 모르고 남을 생각하는 법을 모르면서 살려진 기는 삶의 위기를 불러옵니다. 필요와 요구는 다릅니다.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필요하지만 요구를 채워주는 것은 욕구만 키웁니다.

지나치게 엄격한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개를 사랑한 한 사람이 개의 머리를 붙잡고 좋은 우유를 먹이는데 개는 머리를 흔들고 우유를 먹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결국 실랑이 끝에 컵이 떨어져 우유가 방에 흩어졌는데, 조금 후에 개가 방에 흩어진 우유를 핥아먹고 있었습니다. 개가 싫어한 것은 우유가 아니라 우유 먹이는 방법이었습니다. 사랑 방법이 틀리면 구속이 되고, 기를 너무 죽이면 기회까지 죽이게 됩니다.

지나치게 소유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너무 지나쳐 부정입학과 군대 면제를 시도하며 자녀가 겪어야 할 어려움까지 면제해주려는 것은 소유욕의 발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방황과 실패와 고통은 가슴 아프지만, 그런 삶의 여지까지 주지 않겠다는 것은 구속이고 헛된 욕망입니다. 큰 사랑의 테두리를 치고 자녀가 때로 방황하고 실패해도 자녀가 그 상황을 스스로 극복하도록 묵묵히 지켜보십시오.

지나치게 방임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유를 줄수록 더 세밀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대화와 스킨십을 요구할 때 귀찮다고 “너 왜 그래! 내가 얼마나 바쁜지 알아!”라고 외면하면 나중에 자녀가 마음 문을 닫을 때 대화하고 싶어도 “저 바빠요!”라고 외면합니다. 자녀의 삶에 대한 부모의 지나친 개입은 불필요하지만 자녀의 영혼을 향한 부모의 영혼 이입은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061024)

※ 이 글은 사랑의 전도사 이한규 목사님의 글입니다. 저는 성향적으로 기독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배타적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신앙이란 어떤 울타리를 만들어서는 안되는 것이라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가 한나라당을 싫어하는 이유와 일맥상통합니다. 포용하지 못하는 신앙과 정치는 화합이 아닌 대립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특히 남을 리더하는 지도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은 종교에 초연해야 합니다. 정치인은 물론이고 종교단체의 지도자들 역시 그래야 합니다. 그런 자질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사랑이니 자비니 하는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성철스님을 존경합니다. 이한규 목사님 역시 그런 분이였으면 합니다. <이한규 목사님 홈:http://www.john316.or.kr>
출처 : 無相의 世上萬事 塞翁之馬
글쓴이 : 無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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