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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세상의 비정규직 노동자 주봉희

걷는 즐거움 2007. 2. 6.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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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세상의 비정규직 주봉희’                    

 

 

민주노총 역사에 ‘파견노동자’주봉희를 올리다.

 

지난 달 26일 민주노총 제5기 임원선거가 마무리되었다. 언론과 세간의 관심은 온통 ‘이석행-이용식’ 제5기 신임 집행부에 쏠렸다. 신임 집행부의 노동운동의 방향이나, 노사정 복원 등을 예측하며 이것저것 주판알 튕기기에 바빴다.

 

그러나 이번 선거결과 가운데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인물, 관심도 없었던 ‘비정규직’ 노동자가 민주노총 부위원장에 당선된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노동운동 판에서 이름 꽤나 날리는 대공장 출신의 위원장도 아니었다는 것은 노동운동 역사에 비정규직을 새롭게 각인시킨 사건이다.

 

그는 2000년 6월 KBS 방송사 비정규직에서 해고되어 서럽고 피터지게 4년 1개월을 싸워야 했던 ‘세상의 마이너리티’이기도 했다. 또 인생의 절반을 철저한 비정규직으로 살아온 ‘세상의 비정규직’이라 불리기도 한다. 올해나이 쉰다섯, 민주노총 부위원장에 당선된 주봉희 부위원장을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만났다.

 

 

▲ 민주노총 부위원장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 '파견노동자' 주봉희

이제는 그를 진정한 '세상의 비정규직'노동자라 불러야 할 것이다.(사진 몽구)

 

희망 없는 비정규직 후보 ... 파견노동자 주봉희

 

그동안 민주노총 선거에서 비정규직 후보는 두 번의 고배를 마셔야했다. 2004년 선거에서  홍준표 한국통신계약직노조 전 위원장이 그랬고, 지난 해 보궐선거에서도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공식후보 이남신도 한계와 역부족을 드러내고 낙선했다.
  
“이번 선거는 2004년, 2006년 비정규직 후보 패배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고 말렸어요. 비정규직 후부들이 연거푸 패배하면서 많은 상처들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거든요. 주변에서 많이들 그런 거예요. ‘형, 이름이야 모르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는 것 아는데, 이름가지고 선거하는 것 아니다. 비정규직 후보 안 된다는 것 빤한 것 아니냐고 했죠.”

 

그랬었다. 노동운동 판에서 ‘파견노동자 주봉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민주노총 선거에서 비정규직 노동자후보가 당선된다는 것은 이름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민주노총 내부의 복잡한 정파적 이해관계로 비정규직 노동자후보가 ‘민주노총 입성’이란 그들만의 희망사항 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민주노총 지도부가 입만 열면 비정규직 문제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번 선거 때도 그랬지만 각 정파후보들 비정규직 문제 말 안하는 사람 없습디다. 그런데 정작 선거에서 비정규직 후보들 줄줄이 떨어지는 거예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겪어야 하는 마음에 상처와 실망감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어요.”

 

그는 두 번의 선거패배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안겨준 마음에 상처와 실망감은 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한 서운함으로 이어졌다. “오른손으로는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면서, 왼손으로는 비정규직 해체를 하자는 것입니다. 민주노총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지난 두 번의 선거가 말해준다고 보시면 됩니다.”

 

 

▲ 조끼에서 꺼내어 보여준 파견법철폐 머리띠 

무려 7년간 저 마리띠를 하나만을 머리고 맸다고 한다. (사진 몽구)

 

투쟁조끼, 파견법철폐 머리띠가 나의 전부

 
그는 그야말로 가진 것 하나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후보였다. 조직도 없고, 재정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후보들처럼 통일된 유니폼을 입었던 것도 아니다. 심지어는 비정규직 연대회의마저 공식후보로 추천하지 않았던 ‘무당파’로 홀로서기를 했던 것이다. 그는 투쟁조끼와 7년 동안 머리에 동여맸던 ‘파견법철폐’ 머리띠가 이번선거에서 전부였다고 했다.

 

“아마도 제가 불쌍해 보여서 지지해준 것 같아요.(웃음) 제가 가진 것이라곤 뭐가 있겠어요. 이 투쟁조끼하나 걸치고 ‘파견법철폐’ 머리띠가 전부입니다. 제가 7동안 이 머리띠 하나만 두르고 다닙니다. 이거 하나 믿고 끝까지 간다고 생각했는데... 저의 신념을 믿어주고 지지해준 동지들이 너무도 고맙지요.”

 

 

▲ 머리를 처음 물들일 때 무려 세 시간이나 걸렸다고...

머리가 너무 아퍼서, 마치 두개골이 열리는 통증을 참느라 눈물꽤나 흘렸다고 했다.

머리는 현재 정도의 길이가 적당하고 머리가 점점 자라면서 글씨가 더욱 선명해 진다고...

(사진 몽구)

 

파견법철폐 - 파견철폐 - 파전철폐 된 이야기 
  
주봉희 부위원장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의 말처럼 “제가 많이 특이하잖아요.” 집회 현장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얼굴에는 페인팅으로 머리에는 파견철폐 붉은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진 이색적인 사람.

 

“젊은 사람들처럼 저도 머리에 글자를 쓰면 되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대 앞에 있는 미용실을 여섯 곳이나 찾아가서 머리에 ‘파견법철폐’ 글자를 물들여달라고 했는데 다 못하겠다고 퇴짜를 놓는 거예요. 그러다가 우연찮게 광화문 뒤쪽에 있는 미용실에 갔다가 그곳에서 세 시간 동안 삼만원주고 했어요.”

 

처음엔 그곳도 승낙을 했다가 주인 마음이 바뀌어서 못하겠다고 또 퇴짜를 놓더란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그 글자 물들여 줬다가 국가보안법이나 경찰 조사 받는 것 아니냐’고 해서 제가 파견법 책을 들고 와서 그분한테 설명했어요. 국가에서 파견근로자 보호하겠다고 법을 통과 시켰는데, 지금 수천 명의 사람들이 계약해지 당해서 쫓겨났다. 그래서 이 파견법 철폐를 알리려고 하는데 이 방법뿐이라고 말했더니 해주더라구요.”

 

“그런데 자로 이리저리 재보더니 네 글자 밖에 안 나온다고 하는 거예요. ‘파견법철폐’라고 다섯 글자를 넣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뒤통수에다 쑬 수도 없고, 이마에도 쓸 수 없고 해서 고민하다 ‘파견철폐’ 로 물들인 겁니다.”

 

그는 ‘파견철폐’에서 ‘파전철폐’가 된 사연도 소개해 주었다.
“한번은 종각부근에서 집회를 한참 하고 있는데 할아버지 한분이 어깨를 툭 치면서 ‘너희 조상은 파전하고 무슨 원수가 졌기에 파전을 철폐하자고 하는 것이냐’면서 따지는 겁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거울을 보았더니 진짜 머리가 드러누워서 ‘파견’이 아니고 ‘파전’이 되어있지 뭡니까.”

 

 

▲ 파견법을 알리기 위해 민주노총 지도부와 조합 위원장들에게 수없이 설명을 했지만 관심조차 없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심지어는 민주노총 집회가 열리면 연단에 올라 마이크 한번 잡고서 파견법을 알리고 싶었지만 모두가 허사였다고... (사진 몽구)

 

웃는 날보다 우는 날이 더 많았던 파견노동자

 

주봉희 부위원장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자주 우시냐고... 보도사진을 보면 우는 모습이 많다’고 했더니 “감정이 복받쳐 울 때가 많지요. 우울증으로 고생도 많이 했구요.”

 

그는 비정규직의 서러움으로 울어야 했었다. 98년 7월 1일, 파견제가 합법화됐고, 파견법 시행 만 2년을 앞둔 2000년 6월 방송사 파견노동자들에게도 계약해지가 통보되었다. SBS 437명을 시작으로 MBC, KBS에서도 해고의 바람이 거셌다. 그 해 계약 해지된 걸로 추정되는 파견노동자는 약 5천여명 정도라고 했다.   

 

“SBS는 민간 기업이고  KBS 공영방송이라 설마 자르겠어? 생각했지요. 제가 6년을 넘게 근무했거든요.”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얼마가지 못하고 여지없이 깨졌다.

 

그때부터 그는 거대한 공영방송 KBS와 싸움을 시작했다고 한다. 또 투쟁 사업장이나 집회현장은 단골처럼 안 가본 곳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처음 시작했던 노동조합원들은 하나 둘씩 떠나고 결국 두 달 후엔 자신과 조합 총무국장이 전부였다고 했다.

 

 

▲ 가족 이야기를 하면서 잠시 눈시울을  붉혔다.(사진 몽구)

 

“롯데호텔 투쟁이 있던 날이었는데, 그날 무지하게 비가 많이 왔어요. 제가 총무국장에게 그랬죠. ‘딸린 식구들도 있는데 한 푼이라도 벌어야 하지 않냐’ 그리고는 깃발을 빼었고 가라고 그랬죠. 나도 조합 정리하고 그만 둘 테니 집으로 들어가라고요. 그날 막걸리 한잔 하고, 비 쫄딱 맞으면서 삼각지까지 울면서 걸어가는데, 임을 위한 행진곡을 스무 번은 더 불렀을 거예요.” 

 

그는 돈이 없어 잠자리며 배고픔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갈 곳이 없어서 용두동에 있던 민주노총 서울본부에 살림을 차렸다고 말했다. 또 2001년에는 명동성당에서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 차봉천 초대 공무원노조 위원장 등이 수배상태로 농성을 하고 있었는데 세끼 밥을 얻어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사수대를 자원하기도 했단다.

 

또 그에게 가슴에 한처럼 남겨진 사람들도 많았다. 그는 고 박상윤 서울본부 사무처장이 가장 오랫동안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상윤이가 살아 있을 때, 서울본부에서 주사모[주봉희를 사랑하는 모임]라는 걸 만들어서 CMS로 한 달에 30만원씩. 집회 나갈 때 차비하고 밥 먹으라고 주곤 그랬는데...."

 

그에게 죽음을 알리는 노동자들의 슬픔은 가슴에 송곳처럼 꽂혀 있었다. 배달호, 이용석, 김주익, 정종태... “35년 전에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불살라 죽었다면 이용석은 ‘비정규직 철폐’하라며 죽은 것입니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어도 변한 것이 없어요.”  그들을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맺히기 일쑤라고 했다.

 

 

▲ 세끼밥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명동성당 '사수대를' 자청했다는 주봉희 부위원장(사진 몽구)

 

 

▲ 7년동안 저 머리띠를 하나만을 했다고...

머리에 '파견철폐'글씨로 물들인 사진이 명함에도 그대로 있었다.(사진 몽구)

 

비정규직은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없는 유산.


이처럼 질곡과도 같은 인생의 절반을 비정규직으로 살아온 주봉희 부위원장, 당선이후는 더 많은 일들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봉희 부위원장에게 비정규직 사업으로 선결해야 할 과제들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현안과제로 장기투쟁 사업장과 특수고용직 문제 그리고 노동악법 철폐를 꼽았으며, 민주노총 내 비정규직실 독립채산제 운영을 피력하기도 했다.


“기륭전자, KTX 여승무원. 하이닉스 매그나칩 등 오랫동안 현장에서 싸우고 있는 장기투쟁 사업장을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특수고용직 노동자들 문제도 있습니다. 학습지노조, 덤프연대, 경기보조원 등 이들의 노동3권 또한 쟁취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주봉희 부위원장은 비정규직실 독립채산제 운영에 대해서도 말했다.


“민주노총의 비정규센터를 비정규실로 복원해야 합니다. 현재 비정규사업이 각기 분산되어 있거든요. 한마디로 ‘자기 성과를 내기 위한 사업’에 급급합니다. 이것을 각 지역별로 일원화시키고 중앙에서 집행력을 발휘할 수 조직개편과 민주노총 예산의 일부를 비정규사업에 배치하고 독립채산제로 체계적인 사업을 펼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죠
.”

 

그는 마지막 말로 ‘비정규직만큼은 물려주어서는 안 되는 유산’이라고 했다.
“우리시대에 비정규직은 끝내야 합니다. 노동이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차별과 고통으로부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서는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자식에게 아름다운 노동은 물려주어도 비정규직만큼은 자식에게 물려주어서는 안 되는 유산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근변에 있는 자그마한 칼국수집으로 이끌었다. 배고픔과 서러움이 한움큼 올라올 것 같은 그곳에서 따뜻한 인간의 사랑이 오르는 칼국수로 늦은 점심을 떼웠다. 그리고 따듯한 미소와 웃음 가득한 '세상의 비정규직 주봉희'를 잠시 볼 수 있었다.

 

○ 인터뷰에 응해주신 민주노총 주봉희 부위원장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의 비정규직 근무 체험담, 그리고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비정규직 차별 사례를 댓글과 트랙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온라인에서 힘을 모아 봅시다.

 

★ “비정규직을 보호 못하는 엉터리 보호법(?) 무효화 하라.”
     아고라 네티즌 청원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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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블로터 뉴스공장
글쓴이 : 박성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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