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스크랩] 클림트의 그림

걷는 즐거움 2007. 2. 20. 10:23

 

 

 

 

 

 

 

 

햇빛이 아뜰리에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햇빛은 빛 바랜 양탄자 위,거친 벽에 기대놓은 그리다 만 그림들 사이, 그리고

방 한가운데 서서 자신의 모델들에게 최고 지휘관처럼 명령을 내리고 있는 남자,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리지만 평가가 분분하게 엇갈리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를

적나라하게 비추었다.

그는 다시금 수조안을 휘저었다. 발가 벗은채 온몸이 흠뻑 젖은 소녀들은 은빛을 내뿜으며

아른거리는 물속 연어떼처럼 허공에서 미끄러지고 헤엄쳤다.

붓이 화폭 위에서 춤을 추었다. 소녀들의 몸뚱이는 어느덧 상체와 하체의 구분이 없어진 채

꿈틀거리고 반짝이는 몇 덩어리의 동체로 변했다.

빛을 뿜어대는 육신들의 살갗과 색채와 질감과 빛깔이 한데 어우러져 리드미컬하게

춤을 추었다.

 

 

크리스티네 아이헬 / '클림트' 악마적 퇴폐와 고질적 순수의 공존 中

 

 

 

 

 

 

 

 

 

 

 

예전에 동시대를 살았던 작가 에곤 실레의 그림을 소개 하면서 잠깐 클림트에 대해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아시다시피 클림트는 많은 여성으로 부터 사랑을 받는 화가이다.

그는 여성을 주제로 많은 그림들을 그렸으며 아름답고 세밀하게 장식된 다양한 여성성을

작품속에 표출해낸다. 특히 여성이 지닌 성적매력과 신비감이 독특하게 나타난

그의 그림에 있어 여성이란  대조적인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가장 성스러운 부분인

어머니의 이미지와 가장 악마적인 부분인 요부의 상징이 그림속에 투영되어 있는것이다.

클림트가 활동했던 19세기말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과 더불어 지난세기에 대한

아쉬움과 흥분 그리고 긴장감이 가득하던 시대였다. 그리하여 다분히 향락적이고 말초적인

퇴폐성도 가득하던 시기였으며 또한 그 근저에는 이전 시대에서 볼수 없었던 여성의

지위 향상이라는 새로운 관념이 꿈틀거리던 때였다. 그러한 그의 새로운 시선이 화폭에

담겨져 여성이라는 객체를 통해 너무도 화려하고 강렬한 에로티시즘으로 탄생되었던 것이다.

 

 

 

 

 

 

 

 

 

 

 

 

 

시대를 앞서가던 아르누보 스타일의 클림트의 작품은 폐쇄적인 고국 오스트리아에서 보다는

예술의 자유가 지지되고 옹호되던 파리에서 더욱 많은 환호와 찬사를 받게됨은 당연한 일.

그는 지독한 사랑주의자 였으며 파리에서 운명처럼 만나게된 한 여인 레아를 통하여

정신적 예술적 방황과 성취를 동시에 이루어 내게 된다. 여성에 대한 지극한 상상과

에로틱한 환상이 미치도록 사랑했던 한 여인을 통하여 육체적 욕망의 최고점에 도달한다.

그녀는 클림트의 작품속에 마치 영혼처럼 투영되고 그녀가 지녔던 불멸의 여성성은

클림트로 하여금 사랑에 대한 끝없는 탐색을 가능케 하였던 것이다.

클림트의 아버지는 금 세공사였다고 하며 그의 그림에 자주 보이는 황금빛 문양과 장식

그리고 갖가지 패턴은 그의 어린시절 보아왔던 기억들과 무관하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장식이란 순수함을 덮어버린 위선이나 꾸밈과도 연계되어 있다. 클림트의 그림 속에

자주 나타나는 갖가지 화려한 장식들은 어쩌면 그가 지니고 있던 심리적인 콤플렉스를

감추려던 의도가 존재하는것은 아닐까. 배경의 장식 속으로 사람의 몸이 흡수되어 버리는

은폐를 통하여 인간이 지닌 순수한 몸은 사라지고 장식만이 남는다. 화가의 정신이 붓끝에

담겨 있다고 믿기에 그림을 그릴 당시의 심리도 작품을 통해 우린 유추해 낼수 있으리라.   

 

 

 


 

 

 

 

 

 

 

사실 여행이 클림트의 그림을 처음 접하게 된건 이러한 전원적인 느낌의 풍경화였다.

아마도 고요한 호수라는 이름을 지닌 작품으로 기억하는데 흐린 하늘에 빛이 반쯤

잠겨 호수를 잔잔히 비추는 여린 햇살의 그림자가 너무도 편안해 보였던것 같다.

그는 자신의 작품 활동초기에 어릴적 자라온 오스트리아의 아터호숫가를 즐겨 표현해

내곤 하였다.

나무와 풀과 꽃들이 어우러진 녹색으로 가득한 목가적인 숲속에서 모이를 쪼고 있는

가금류의 평화로운 모습에서 발견되는 그의 여유로운 정신세계.

저러한 풍경화를 보면서 언제든 한적한 전원에 자리잡은 잔잔한 호수와

그 수면위로 떨어지는 빗방울같던 한 화가의 맑은 영혼이 연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요하고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드러내고 싶어했다던

클림트의 작품세계를 유독 선호하는 독자들도 많은듯 하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큰 주목을 받은 동시에 가장 많은 비판과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작품이다. 알려진대로 그의 제작의도는 철학, 의학, 법률로 표상되는 이성의 힘과

그로인한 세계의 형이상학적 발전상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 왼편의 벌거벗은

나체들이 등을 보이며 하늘로 올라가는 형상은 그러한 학문적인 느낌과는 다르다.

그림의 한가운데에 흐린 안개에 휘감겨 떠다니는 얼굴 모습은 참으로 그로테스크 하다.

이것이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던가. 세상의 권위와 제도에 반기를 든 마치

고귀한 인생을 조롱하는 듯한 이 그림은 숱한 반대와 비평의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하여 클림트는 특히 자신에게 화살을 가하는 이른바 빈의 기득권층과 결별을 선언하게

되고 초기에 보여준 목가적이고 고전적인 화풍에서 벗어나 파격적이고 자유로운 화풍을

추구하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2차대전중에 나찌의 손에 불살라졌다.

 

 

 

 

 

 

 

 

 

 

잘 알려진 그림중 하나인 다나에라는 작품이다. 신화속에 존재하는 그녀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성적 매력이 가득하다. 아버지에 의해 탑속에 가두어진 그녀이지만
그녀에게 반한 제우스가 황금비로 변신하여 그녀의 체내에 들어가 사랑을 나누고있다.

성적 환상을 직설적으로 나타내기 쉽지 않던 시기에는 이처럼 신화의 주제를 통해

여성을 향한 적나라한 에로티시즘의 발현을 구가하기도 한다.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그녀가 얼마나 지극한 성적 황홀감에 빠져있는지 실감이 난다.
풍부하며 섬세한 얼굴선의 이미지와 유방을 움켜쥔 마치 떨고 있는듯한 손끝.
그리고 그녀의 두다리 사이로 물살처럼 흘러내리는 황금비는 격정에 가득찬
강건한 남자의 정자를 상징하리라. 폭포를 연상시키는 마치 격류처럼 흐르는
황금빛의 정자는 은밀한 곳을 통해 그녀의 체내로 빨려들어 가고있다.
 
 
 

 

 

 

 

 

 

 

 

희망이라는 이 작품은 한때 클림트의 모델이었다가 그와의 사이에 두 명의 아이를 낳았던

짐머만이라는 여성을 표현한 것이다. 워낙 여성 편력이 심한 클림트 였지만 아이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고 하며 처녀들의 어떤 모습보다도 아기를 배에 담은 임산부의 옆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그림에 깔려진 복선을 보라.

사생아 였지만 탄생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아이는 죽었고 죽어간 자신의 아이를

생각하면서 지녀왔던 희망은 절망이 되어 버렸다.

새로운 생에 대한 기다림과 행복감 그리고 환희가 가득하던 화폭에 그는 해골과

마치 죽음의 사자를 연상시키는 음산한 표정의 인물들로 채우게 된다.

 

 

 

 

 

 

 

 

아마도 클림트의 그림들 중엔 키스라는 이름을 지닌 이 작품이 가장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키스가 첫 경험인 청순한 처녀인듯한 여인의 모습에 먼저 눈길이 간다.

꿈꾸듯 눈을 감은 그녀의 표정은 순수미를 의심치 않게 한다. 한남자에게 안겨 사랑의

기쁨에 충만된 발그레한 그녀의 얼굴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녀의 손과 발을 보라.

한 손은 남자의 가슴에 수줍은듯 닿아 있지만 다른손은 그의 목을 휘감고 있다.

두개의 손끝은 이른바 복선이다. 떨리는 첫 경험의 순수함과 그녀의 내면에서 치열히

갈구되는 관능이자 요염함이다. 그리고 벼랑끝에 걸린 긴장한 발가락은 절대절명의

위험한 순간을 지탱하려는 안타까움이 느껴진다.결국 사랑의 유혹은 죽음으로 암시된다.

사랑이 그리고 성적 욕구가 달콤한 쾌락이자 죽음의 상징인것은 당시 세기말을 관통하던

도착적인 관능의 어두운 그림자와도 같을 것이다.

이 그림에서도 화려한 황금빛의 문양과 장식이 몽환적인 밤하늘을 비추며 선명히

부각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밟고있는 너무도 아름다운 색색의 꽃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사랑이 지닌 순수의 가치와 더불어 슬프고 우울한 에로티시즘을 발견하는 것이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이라는 이 작품은 2006년 7월 회화 사상 최고가인

1억 3500만 달러에 팔리며 이전의 파블로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이 가지고 있던

기록을 경신했다. 그가 그림속에서 추구해 왔던 장식의 완성은 불멸의 황금속에서

찬란히 빛을 발하고 있다. 하지만 고대 이래로 인간이 추구해 왔던 황금이 주는 가치의

무게감과 동일시 되는것은 그 허망함과 불길함이다. 죽음을 덮고 있는 황홀한 냄새.

클림트가 아르 누보 즉 유겐트 스틸의 거장으로서 전성기를 구가한 시기에 내놓은

이작품은 에로티시즘에 대한 표현과 장식성이 잘 조화되어 나타나 있다.

생생하고도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색채감과 화려한 기하학적 무늬의 장식들이

보는이로 하여금 눈이 부시도록 만든다. 

 

정리 하자면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는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났으며 처음엔 역사주의의 영향을 받은 장식적인 벽화와 천장화를 그렸다.

1898년의 그룹전()을 통하여 오스트리아 유겐트 스틸의 대표적 존재로 지목되었다.

얼마전 개봉한 영화 '클림트'에서 연기파 배우 존 말코비치가 주연으로 진지한 내면의

연기를 펼쳤는데 영화에서는 클림트가 단지 우의화(allegory) 화가였다는 것을 강조하며

마치 알레고리를 펼치듯 현실과 환상을 뒤섞어 놓았다고 들었지만 보고 싶은 영화다.

사후에 그의 사생아를 낳은 여자들의 양육권 신청만 10여건에 달할 정도로 어찌 보면

평생에 걸쳐 난잡하고 문란한 애정행각을 벌여온 그였지만 그의 행각은 치열한 예술정신의

발현이었을수도 혹은 뇌독을 앓던 뼈아픈 정신장애의 산물 이었을수도 이었으리라. 

 

 

 

 

 

 


 

 曲 : Angel Eyes / Anders Lindskog

 







 



출처 : 내게로가는 旅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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